원효성사의 설화대계


 
원효성사의 설화대계
1. 사라수(裟羅樹)의 비밀

1)동방의 새벽
불지촌 훈장댁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마을 빨래터에는 7~8명의 아낙들이 몰려들어 무언가 부러운 듯한 목소리로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오늘 훈장님 댁의 며느리가 친정으로 해산하러 간대요……."
"뭐? 친정으로?……."
"그런데 경주 서방님이 직접 데리고 간다는데……."
한 아낙이 부러운 듯 수다를 떨었다.
"새댁은 복도 많구먼! 서방님에다 훈장님까지 허락을 하셨으니 말이야!"
"글쎄 누가 아니래나……."
그 때 남편의 부축을 받은 사라 부인이 조심조심 빨래터 쪽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시아버지 잉피공도 빨래터까지 따라 나서며 며느리를 걱정하였다.
"제발 순산하여야 한다."
“네, 아버님……. "
사라 부인의 말끝은 흐렸다. 그러나 아내를 부축하고 내려오는 설담날은 얼마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친정으로 가서 해산하면 산후 조리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마을 빨래터를 지날 때 2~3명의 아낙이 나서며 담날 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새댁! 순산하고 오시게……."
"고맙습니다."
남편 담날도 덩달아 신바람이 나 그저 고개를 꾸벅거렸다. 내외는 정다운 듯 행복에 젖어 불지촌을 빠져 나왔다. 어느덧 좁은 계곡에 접어들었을 때 언덕배기에는 밤나무가 즐비하고 계절이 초여름이라 밤꽃이 만개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사라 부인은 잠깐 생각에 잠긴다. 그것은 자신이 열 달 전 아기를 가질 때 꾸었던 태몽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꿈이 보통 꿈은 아닌 듯합니다. “
한참을 걷던 그의 아내가 문득 꿈 이야기를 하자 남편 담날은 귀가 쫑긋하였다.
“그래! 그 때 그 꿈의 내용이 어떠하였소?”
남편은 바싹 아내 옆에 다가서며 캐물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하늘에서 별이 하나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내 품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깥에는 천둥소리도 없었고 번개가 친 것도 아닌데, 아무 소리도 없이 별 하나가 떨어져 제 품에 안기는 꿈이었어요."
남편 담날은 조심조심 아내를 부축하며 아내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것 참 신기한 꿈이군요. 아마도 부처님께서 우리 내외에게 훌륭한 아이를 점지 하시려나 보오.”
이들 부부는 이른 아침에 마을을 나섰으나 워낙 아내가 만삭이라 걸음걸이는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는 어느덧 중천에 걸렸다.
"나리, 해전에 친정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소. 여기서 경주라면 먼 길이 될 터이니 말이오."
이런 저런 얘기로 두 사람이 대화하며 밤 밭에 이르렀을 무렵, 이씨 부인이 황급히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산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배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이에 남편 담날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야단 났구나! 고개만 넘으면 인가라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부인! 정신을 차리시오."
남편 담날이 어깨에 아내의 팔을 걸고 안간힘을 다하였지만 이씨 부인은 더 이상 꼼짝하지 못하였다.
“아니 되겠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걸음을 뗄 수가 없어요. 어쩌면 좋지요?."
아내는 이를 악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허! 이를 어쩌지? 사방이 산인데 이거야 말로 진퇴양난이군."
그 때 그의 아내가 황급한 김에 밤나무 밑을 가리키며,
“저기라도 어서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어서요!"
담날[남편]은 대답 대신 아내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길섶의 밤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순간 아내의 비명 소리는 계곡을 휘감았고 담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자신이 입고 있던 관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친 후 밖에서 산실이 보이지 않게 한 후 주변의 풀들을 손으로 뽑아 밤나무 아래에 포근하게 깔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아내의 순산을 기원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오색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산실을 휘감더니 차츰 사방으로 번져 어느덧 밤나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마치 무지개가 온 누리를 휘감은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원효의 탄생설은 석가모니의 탄생설과 너무나 공통점이 많다. 즉 인도의 왕비 마야 부인이 태자 석가모니를 출산하기 위하여 친정인 코올리성으로 이동하던 중 ‘룸비니동산’에 이르러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한다. 급한 김에 수행한 시종들이 무우수(無憂樹) 아래에 장막을 치고 산실을 만들어 그 아래에서 무우수 가지를 쥐고 태자를 낳았는데, 이때 하늘에서 영롱한 불빛이 갓 태어난 아기를 향해 뻗어 그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무우수와 사라수는 모두 신령스러운 나무로서 둘 다 세계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지상의 근심과 걱정을 날려 보내는 성수(聖樹)로 상징되고 있다.
훗날 원효가 태어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하였는데, 여기 사라수란 산모의 급한 출산을 앞두고 원효의 아버지 담날이 자신의 웃옷을 벗어 장막처럼 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때 ‘사(裟)’는 ‘사라비단’ 또는 가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밤나무 밑에서 태어난 설서당[원효의 아명]은 할아버지 잉피공과 아버지 담날의 사랑 속에서 보배처럼 자랐다. 그러나 어린 원효는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어머니를 잃고 자라야 했던 슬픔과 외로움은 언제까지나 그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원효불기조]

2)사라사(裟羅寺) 창건
불지촌 초개사에서 정진하던 원효가 어느 날 자신이 태어난 율곡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그 율곡 밤 밭에서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이 밤나무 아래에서 나의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시다니…….”
원효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신라의 미관말직이었던 아버지 담날과 떨어져 현성산 아래 자그마한 산촌 마을에서 시아버지인 잉피 공을 봉양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왔다.
원효의 어머니는 신혼 초부터 가세를 일으키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낮에는 품앗이와 땔감을 구하고, 밤이면 길쌈과 바느질로, 그의 하루생활은 한 시각의 여유도 없었다. 그는 만삭의 산모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선 생계가 우선이었다.
그러던 그의 어머니가 한 해 겨울 눈보라 치던 어느 날 그를 품안에 안은 채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원효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웠고, 자식에 대한 지극한 애정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던 그가 문득 이 율곡을 찾았다.
‘내 어머니께서 여기서 나를……, 얼마나 힘들었을까…….’
원효의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하였다. 원효는 밤 밭을 오르내리며 자신이 태어났다는 그 밤나무 아래에서 문득 그 때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그 사랑을 그려 보았다.
만삭의 어머니가 친정인 경주로 해산 길에 나서다 갑작스런 산기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겨를도 없이 해산을 맞이하여야만 하였던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급박한 순간에 그가 준비하였던 것은 길섶에 있는 밤나무 아래에 아내의 산실을 꾸리는 것이었다. 담날은 급한 김에 주위의 풀을 뜯어 모아 방석을 만들고, 길가를 가리기 위하여 자신이 입고 있던 관복을 벗어 나무에 걸쳤다. 산실로 꾸며진 밤나무에는 눈송이처럼 밤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 산실은 마치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를 연상하게 하였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옷을 벗어 이 나무를 가리셨구나!’
원효는 그 밤나무 아래서 당시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경황 없던 모습을 그리며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 이 나무는 사라수야, 일찍이 석가모니께서도 무우수 아래서 태어나셨듯이 나의 부모님께서도 여기다 장막을 치신 거야!’
원효는 그 밤나무 아래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과 들꽃들을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체취를 더듬었다. 그때 동행하였던 시자가 말했다.
"큰스님! 이 밤나무가 곧 사라쌍수가 아니겠습니까?"
"사라쌍수……?"
그는 대답 대신 유별나게 아래로 늘어져 있는 가지를 어루만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 어머니께서 이 가지를 쥐고 나를 낳았을 것이다. 아! 얼마나 힘들었을꼬?…….'
원효의 마음은 애절하였다.
그 때 어디선가 파랑새 한 마리가 그의 머리위에 맴돌다 날아갔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파랑새를 덧없이 쳐다보았다. 파랑새가 사라져 간 율곡에는 운무가 가득하였다.
‘그래! 이곳은 나를 위해 당신을 버렸던 어머님의 자비심이 머문 곳이다. 세상 어머니가 다 그렇듯 나의 어머니도 당신의 몸을 보살피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였으리라…….’

어느덧 해는 서산에 걸려 있고, 그날따라 낙조는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율곡에 내려 깔린 운무는 율곡 일대를 솜털처럼 포근히 감쌌다. 그 때 문득 원효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여기에다 어머니의 자비를 그리는 절을 짓자, 절을…….'
그는 어머니의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며 관세음보살을 그렸다.
그는 그 자리에다 움막을 짓고 다음 날부터 자그마한 암자를 짓기 시작했다. 밤 골에 밤이 익어갈 무렵, 원효는 그 자리에 작고 아담한 그의 어머니 모습을 닮은 암자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암자를 아버지가 자신의 옷을 벗어 밤나무 가지를 가려 산실을 만들었다 하여 ‘사라암’이라 하였다.
원효가 여기에 암자를 세우고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율곡 일대 밤밭의 밤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밤나무는 이상하게 상서로운 빛이 났으며 그 밤 한 톨의 크기 또한 예사 밤과 달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상서로운 일이라 하며 원효의 효심을 찬양하였다.
이는 원효의 출생과 더불어 배고픈 중생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주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훗날 그의 시자가 이 절을 맡아 관리하면서 은사를 생각하여 ‘사라사’로 고쳤다. 사라사는 주변 젊은 학승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그러나 원효에게 사라사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에게 사라사는 곧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원효불기조, 김종국의 《원효설화대계》]

3)율곡의 사라율(裟羅栗)
원효가 태어난 자리, 즉 산실을 차렸던 밤나무, 그 밤나무 가지는 땅에 닿을 듯 치렁치렁하였고 거기에 달린 밤송이는 유난히도 크고 눈부셨다. 이 밤나무에 달린 밤을 사라율(裟羅栗)이라 하였는데, 당시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머슴[寺奴]에게 매일 저녁 끼니로 밤 두 톨씩을 주었다. 주지는 그에게 두 톨 이상은 주지 않았다. 이것을 억울하게 생각한 사노가 관가에 나가 호소하였다.
“나리! 저는 사라사의 머슴이온데, 온종일 일을 하고도 매일 저녁 끼니로 겨우 밤 두 톨을 얻어먹을 뿐입니다.”
“뭐? 밤 두 톨로 끼니를 때운다고?”
“예, 밤이 맛이 좋기는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며 하인은 궁상을 떨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와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
“그게 정말이라면 이상한 일이다. 우선 사실을 알아보고 조치를 취할 터이니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라!”
하니 그는 순순히 물러갔다. 관청에서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그 밤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밤인가 해서 관리를 보내어 나무에 달린 밤을 따오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밤은 한 톨이 밥사발에 가득 찰 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관청에서는 앞서 호소한 절의 머슴을 불러 꾸짖었다.
“네 이놈! 밤은 밤이지만 단 한 톨로도 한 사발이나 되니 큰 밤이 아니냐? 그걸 두 톨이나 먹고도 모자란다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너에게 명하노니, 앞으로는 저녁 한 끼에 밤 한 톨만 먹도록 하여라.”
욕심 많은 하인은 도리어 감량의 벌을 받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곧 유별나게 컸던 사라율이 원효의 출생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배고픈 대중에게 은혜를 베푸는 원효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원효불기조]

2. 잉피공의 갈등

1)잉피 공의 훈도
서기 617년, 율곡(栗谷)의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설서당은 그가 태어난 뒤 얼마 후 어머니를 여의고 만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출산하는 과정에서의 산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서당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잉피 공에 의하여 자랐고, 훈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같은 훌륭한 장수로 자라기를 바랐지만, 따로 스승을 정하여 공부하지는 않았다.

당시 그의 아버지 담날은 신라의 17관등 중 11관등에 속하는 내마라는 벼슬을 한 관리로 줄곧 도성인 경주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당의 어린 시절은 당연히 그의 고향인 불지촌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성산 아래에서 호연지기를 길렀으며, 그에게 엄격한 스승은 할아버지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서당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고, 그 아픔은 곧 그리움으로 변하였다.
어느 날 잉피 공이 서당을 불렀다.
“오늘도 동네 아이들과 벗을 하였느냐?”
서당은 힐긋 할아버지를 쳐다보고는,
“예~.”
서당은 별 흥미가 없는 듯 대답하였다.
“왜 마음이 상했느냐?”
하며 뭔가 쓸쓸해 보이는 서당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닙니다.”
서당의 대답은 의외로 짧았다. 늘 그늘이 져 있는 서당을 바라다보는 잉피 공의 마음은 내심 불안하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어디 이 할아비에게 말해 보아라!”
서당은 이내 얼굴 표정을 고치고 잉피 공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할아버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진정이옵니다.”
할아버지는 그러는 서당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래! 또 어미가 그리웠던 모양이구나?”
하면서 등을 툭툭 쳐 주었다. 할아버지 잉피 공은 자신에게 손자[훗날 원효]를 맡기고 훌훌히 떠나버린 서당의 어미를 생각하였다. 친정으로 출산 준비를 하러 가던 중 율곡에서 황급히 손자를 해산하고 자신의 몸은 돌보지도 않고 홀로 된 시아버지의 수발을 걱정한 나머지 불지촌으로 되돌아온 며느리, 그리고 미관말직인 아들[담날]의 쥐꼬리만한 녹봉에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 왔던 자신의 며느리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그녀가 그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았던 날, 조금 남은 땔감으로 시아버지 방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드리고, 자신은 어린 서당과 함께 차디찬 냉방에서 긴 겨울밤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혹 자신의 아들이 추위에 떨까 걱정하여 자신이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 아이의 온몸을 감고 자신의 체온으로 긴 밤을 새웠던 것이다.
그 결과 아침에 그녀는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버리고 아들 서당을 살려 낸 것이다. 유별나게 효심이 깊었던 서당의 어머니는 이렇게 눈 쌓인 깊고 깊은 겨울 밤 백의의 관음처럼 이 땅을 떠난 것이었다.

서당은 훗날 할아버지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한량없는 자애심에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자라면서 모았던 그의 눈물을 모두 쏟아내었다. 잉피 공은 그의 효심에 시아비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여생을 서당을 위하여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잉피 공에게는 어린 서당의 아픈 마음이 자신의 상처 이상으로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원효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초채지년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잉피 공은 훌륭하게 자라주는 그의 늠름한 모습에 감사하였다. 그러나 늘 공부에만 빠져있는 서당의 모습에서 적잖게 걱정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잉피 공의 강력한 권고로 서당은 화랑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당은 무술 연마보다 서책을 더 가까이 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할 뿐 낭도 생활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였다.
하루는 잉피 공이 서당을 불렀다.
“어째 무술 연마는 멀리하고 서책만 가까이 하느냐?”
하자, 원효는,
“할아버지, 저는 화랑에 입문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여러 전쟁을 지켜보았습니다. 하나 전쟁은 저와 인연이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잉피 공은 손자 서당에게 이런 저런 얘기로 달래도 보고, 꾸짖어 보기도 하였으나 그의 깊은 마음 속에 담겨진 결심은 이미 낭도 생활을 떠난 듯하였다. 할아버지 잉피 공은 더 이상 서당을 강요하지 않았다.
서당은 지학지년에 이르러 스스로 낭도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전장에서 인생무상에 대한 무한한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전장에서 수 없이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외침 속에서 그가 가장 부르고 싶어 하였던 ‘어머니’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마치 아우성과도 같았다. 서당은 그렇게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또 그들과 함께 어머니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서 그는 지금껏 가슴 속에 묻어왔던 어머니의 자애심을 떠올렸다.

2)낭도의 눈물
원효는 설서당(薛誓幢)이라는 이름으로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잉피공에 의해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할아버지 잉피 공은 불지촌에서 서당을 직접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게 하였는데, 늘 그의 마음속에는 신라의 대장군인 김유신과 같은 훌륭한 장수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였다. 이러는 조부의 가르침에 유년기의 설서당은 초채지년[지금의 14살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러 조부 잉피 공의 강력한 권고로 화랑에 입문하였다. 하지만 서당은 서로가 죽이고 죽는 전장 속에서 자신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화랑의 세계에서 떠나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본래 ‘서당(誓幢)’이란 이름은 조부인 잉피 공이 그를 훌륭한 장수로 성장할 것을 바라는 뜻에서 지어 부른 이름이라 하지만, 이에는 신라의 군사 조직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듬해인 지학지년[15세경]에 이르러 신라 도성에서는 큰 무술 경합이 벌어졌다. 그것은 당대 최고의 화랑을 뽑는 무술 대회로, 이 자리에는 김춘추 공과 김유신 장군, 신라의 문무백관 귀족들은 물론, 선덕여왕과 다음에 왕위를 이어받을 진덕여왕까지 친히 참관한 자리로 장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경계는 삼엄하였다.
이 자리에는 전례 없던 내용이 공고되었다. 그것은 오늘 경합의 최고 승자에게 선덕여왕은 김춘추의 딸 아유다를 그의 아내로 삼도록 윤허하겠다는 것이었다.
경합이 시작되자 장내는 숨을 죽이듯 조용하였고 들리는 소리로는 두 사람씩 그들의 자존심과 경쟁심에 불타는 기합 소리만 넓은 연병장을 메아리칠 뿐이다. 경합은 오후 늦게까지 진행되었고 경합 중에 다친 화랑의 수도 늘어만 갔다.
이윽고 막바지 경합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 두 개 조로 나누어진 예비 경합에서 최종 승자인 두 사람이 결판을 내는 시합이다. 장내는 물을 끼어 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연병장에는 말을 탄 두 화랑의 눈빛만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드디어 여왕이 나서 그들을 위로하고 최선을 다해 승자가 되기를 기원했다.

“두 화랑은 들으시오! 그대들은 신라에 제일 가는 화랑이다. 하지만 시합에는 승자가 둘이 될 수는 없다. 하여 이번 경합에 최종 승리자에 대해서는 내 약속대로 김춘추 공의 딸 아유다와 혼인을 윤허하겠노라! 절대 양보하지 마라! 그리고 신라 화랑의 투혼을 위한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어라!”
이 같은 여왕의 주문이 있자 두 화랑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서로가 승리자가 될 것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아유다의 마음도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경합에서 자신이 낙점한 한 청년이 바로 그의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오매불망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였던 화랑은 다름 아닌 ‘설서당’이었다.

그녀 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두 화랑, 그들은 당대 신라 화랑의 최고를 자랑하는 서당과 거진랑이었다. 누구도 이 두 화랑에 대하여 승패를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왕 옆에서 온몸을 떨며 초조하게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김춘추 공과 딸 아유다였다.
이윽고 최종 경합을 알리는 북이 울렸고, 불을 튀기는 둘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장내는 흥분과 긴장, 그리고 초조 속에서 숨을 죽이는 기나긴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둘의 승부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긴장된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화랑이 느닷없이 칼을 떨어뜨리고 만다. 장내는 함성이 울려 퍼지고 승자에 대한 격려의 목소리는 하늘을 진동시키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흥분의 순간도 잠깐, 다시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그 이유는 누가 승자며 누가 패자냐 하는데 관심이 몰렸기 때문이다. 장내가 정리되고 잠시 후 여왕 앞에 늠름하게 모습을 나타낸 낭도, 그는 ‘거진랑’이었다.

장내는 또 한 번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 자리에서 여왕은 친히 그를 맞이하면서 상을 내리고 그에게 김춘추 공의 사위 됨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이 직접 참여한 신라 화랑의 무술 경합은 모두 끝이 났다. 그러나 패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유다 역시 당시의 운명 같은 상황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번뇌와 갈등

화랑과의 경합에서 스스로 승부를 포기한 설서당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군막에 돌아왔다. 그는 목숨을 건 거진랑의 열정을 되새겨 보았다.
'명예가 무엇이기에…….'
지금 그의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거진랑과의 경합보다 지난 전장에서 수 없이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목숨을 버렸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들의 경합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 너무나 허무하구나!'
서당은 문득 낮에 벌어졌던 경합을 되새겨보았다.
넓은 연무장에서 화랑과 경합, 그리고 그 행사에 친히 참석한 여왕과 그 주위를 받든 김춘추 공과 김유신 장군, 또 그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손에 땀을 쥐며 경합을 지켜보던 어린 원화 아유다낭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이에 참여한 화랑들은 아유다를 자신의 짝으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모두가 목숨을 건 도전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그 순간 우정도 버린 채 오로지 최고의 승자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서당은 그와의 경쟁에서 스스로 칼을 버리고 말았다.
장내에는 최고의 경합자로 낙점되고 있던 서당이 갑자기 칼을 버리자 영문도 모르는 채 환호성이 터졌다. 그 환호성은 차라리 안타까운 호소와도 같았다. 그러나 서당은 스스로를 자제하는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그래! 차라리 나의 용기가 옳았는지도 몰라…….'
하면서 군막을 나왔다. 서당의 생각과는 달리 군막 밖에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낯에 있었던 살벌한 경합 분위기와는 달리 국왕이 하사한 술과 고기로 모두가 평상심을 찾고 있었다. 서당은 잠시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서당랑! 오늘 경합은 사실상 서당랑이 최고였어!"
동료들의 격려도 있었다. 그러나 서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다잡았다. 이 때 한 낭도가 서당에게 다가섰다.
"서당랑이 칼을 떨어뜨릴 때 가장 안타깝게 바라본 사람이 아유다낭이었소."
하고 일러 주었다.
"아유다낭이……. 어찌?"
"처음부터 서당랑에게 관심을 둔 거지요. 시종일관 서당랑을 응원하는 모습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하였소!"
서당은 잠시 그 때 여왕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화랑들을 지켜보던 김춘추 공의 딸 아유다낭을 그려보았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원화였다. 그러나 서당은 그를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서당은 언젠가 화랑 수련 중에 본의 아니게 먼발치로 원화들의 수련 현장을 훔쳐 본 적이 있다. 그 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던 원화, 그가 아유다낭일 줄은 몰랐다. 서당과 아유다낭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게 된 것이다.
'아유다낭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유다를 불러 보았다. 그때였다. 서당이 앉아 있는 반대편 군막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곳에는 낮에 보았던 김춘추 공과 아름다운 여인 아유다가 여러 원화들과 함께 화랑들의 훈련을 위로하기 위하여 친히 화랑 군막을 찾은 것이다. 원화들을 맞이한 군막의 화랑들은 낮에 있었던 그 살벌함은 찾아볼 수 없고 모두가 연모의 마음에 빠져 있었다.
서당은 군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거진랑을 생각했다. 밤은 무르익어 갔다. 이제 시끄러운 화랑들의 함성도 모두 밤의 적막 속으로 묻혀들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이른 아침이다. 어디선가 스산한 가을바람이 새벽 공기를 깨고 몰려들었다. 또 한바탕 부산한 하루가 시작되려나 보다. 새벽부터 여기저기서 수련을 시작한 화랑들의 기합 소리가 찬 공기 사이로 메아리쳤다.

'오늘은 죽고 죽임이 없어야 할 터인데…….
서당은 멀리 서녘을 바라보며 그리운 고향을 그려 보았다.
막상 할아버지 잉피 공의 강한 권유로 화랑에 입문하기는 하였지만 여러 차례 전장에서 그가 지켜본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참담하였다. 그는 그 전장에서 인생무상의 극치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내가 갈 길은 이 길이 아니야!'
서당의 마음은 굳어 있었다. 바로 그 때다. 군마 한 필이 미끄러지듯 수련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들으시오! 백제군들이 우리 신라의 경계를 넘었다 하오. 어서 출전 준비를 하라는 대장군의 영이 내려졌소."
하였다. 이 소리에 화랑들은 오합지졸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전령의 목소리는 이리저리 군막 사이로 메아리쳤다.
"어서! 출전을 서두르시오. 대장군의 명입니다."
이윽고 이리저리 흩어졌던 화랑들이 한 곳에 집결했다. 그 속에는 어제 경합의 수장이 되었던 거진랑과 결투를 중도에 포기하였던 서당랑도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였다. 얼마 후 김유신 장군의 부장인 비녕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모두 들어라! 지금 백제군들이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그 수는 줄잡아 2만이 넘는다는 세작의 보고가 있었다."
장내는 숙연하였다. 비녕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오늘 죽기를 무릅쓰고 출전을 하여야 한다."
비녕자의 칼끝은 하늘 높이 올려졌다.
"모두들 나를 따르라!"
비녕자는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채찍으로 쳤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대야성 부근의 한 야산이다. 그 곳에다 진을 친 1만여 신라군은 백제의 2만 정병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백제군에 비해 열세인 신라군은 싸우기도 전에 기가 죽어 있었다.
이 전쟁을 지휘하는 김유신 대장군은 무엇보다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기에 전전긍긍하였다. 멀리서 백제군 2만의 함성이 신라군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러나 신라군 진영은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그러기를 수 시간,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김유신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부장들에게 명을 내렸다.
"전면전은 안 된다. 무엇보다 군사들의 사기가 급선무다."
이 때 비녕자가 김유신 앞에 나서며,
"대장군, 소장이 나서겠습니다."
"아니! 비녕자가?"
"장군님! 제가 나서서 신라군의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녕자는 이 말을 남기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고 말았다. 백제군의 함성은 하늘을 찌르듯 하였다. 이 때 이를 지켜보던 아들 거진랑이 김유신 앞에 나서며 자신 또한 적진에 나가도록 청하였다. 김유신은 거진랑의 청을 거절하였지만, 거진랑의 결심은 단호하였다.
"제 어찌 아들 된 자로 아버님의 죽음을 이대로 지켜볼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보내시어 신라 화랑의 명예를 되찾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김유신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거진랑은 그렇게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백제 진영에서 또 한바탕 함성이 울려 퍼졌다. 거진랑이 적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신라 진영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어디선가 한 화랑 목소리가 깊은 침묵을 깨고 전장에 메아리쳤다.
"우리 모두 거진랑의 뒤를 따릅시다!"
하며 말을 몰았다. 이를 지켜보던 화랑들은 일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멀찌감치 서있던 군졸들도 다투어 그들의 뒤를 미친 듯이 치달았다. 순식간의 일들이다. 모두가 죽기를 결심하고 달려든 결과 전투는 백제군 9천여 수급을 벤 후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나자 서당은 신라군의 시신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거진랑을 찾아내었다. 거진랑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서당은 거진랑을 끌어안고 오열하였다.
"거진랑!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거진랑의 몸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거진랑! 어찌하면 좋소이까?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이까? 어서 정신을 차려 보시오."
서당은 몸부림 쳤다. 그 때 거진랑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야유다를 부탁하오.……."
이렇게 거진랑은 서당과 이별했다. 서당은 거진랑을 안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전쟁이 다 무엇인고!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죽고 죽여야 한단 말인가?"
서당은 거진랑의 차가운 시신을 부둥켜안고 신라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화랑이 되었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낭도복을 벗어던지고 군막을 뛰쳐나왔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열전 김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