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법명 정견(正見)으로 다시 시작한다

 

기독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불성설(語不成說) - 말이 안되는 소리

불교 :
태어났기 때문에 고생이 있다.
병이 들고, 늙고, 미운 이를 만나야 하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야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그리고 죽고.
이런 고생을 벗어나는 방법에 팔(八)정도라 하는 것이 있다는데
그 첫번째가 정견(正見)이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 견(見)이란 관찰하고 선택한다는 불교용어인데 인간의 한 작용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 형용사에 해당하는 정(正)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1. 망령됨을 떠나는 일
예로 물통에 물이 가득차 있을 경우, 물이 끓고 있거나 이끼나 풀로 덮혀있거나, 바람에 물결이 일령이면 자기 얼굴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의심등등으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2.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 - 전도는 뒤집히는 것
순서를 뒤바꾸거나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름다움(美)과 더러움(醜-추)을 잘못 판단하거나, 변화하는 것과 불변인 것을 착각하는 것.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 지혜가 적으면서 명성을 얻으려는 것 등등.

불교에서 유명한 네 전도현상이 있다.
첫째 : 상(常)전도 -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
둘째 : 낙(樂)전도 - 괴로워야 할(苦) 이 인생을 즐겁게 보는 것
셋째 : 정(淨)전도 - 부정한(더러운) 인간존재를 청정한 것으로 보는 것
넷째 : 아(我)전도 - 무아(無我)인 존재를 자아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
* 나중 이 상낙아정에 대한 설명이 있으리라.

3. 극단을 떠나는 일
붓다의 제자 중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다고. (눈이 멀어버린 다른 이도 있었지만)
부처님의 그 유명한 중도(中道)의 말씀.
그대가 뜯고 있는 거문고의 줄이 너무 느슨하면, 또 아니면 너무 팽팽하면?
道의 실천도 이렇게 득단을 떠나 中道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

나는 광흥사에서 관적(觀寂)이란 법명을 떠나 이제 正見이란 법명으로
새로이 불법 공부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