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흥사 명부전

훈민정음해례본 복장봉안 불사 권선문


 

거룩한 삼보에 귀의합니다.

그동안 훈민정음해례본에 대해 꿈꾸어오던 것을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내려고 결정했습니다.
소승이 광흥사로 부임해 오자마자 연관된 일이 ‘훈민정음해례본’소송이였음을 우리 신도님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 훈민정음해례본의 훼손을 막고 환처하기 위해 소유권과 소재지를 초월하여 배씨가 국가에 우선 환원하는 것으로 최종판결이 나왔지만 아직 환원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형사소송 중에 도굴범 서씨의 증언에 의해 훈민정음해례본이 광흥사 시왕님 복장물이였음이 밝혀지고, 소승이 한글창제와 광흥사의 연관을 공부하다가 보니 새로운 역사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이라는 유교국가에서 세종대왕의 위대한 문자혁명, 훈민정음 창제는 불교와 관련되지 않고는 불가했음을 알았습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범어에 모태를 두고 있으매, 문자 창제의 주역이 집현전 학사가 아닌 당시의 고승이였던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였습니다.
그렇기에 훈민정음을 활용하여 지은 것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월인천강지곡’과 부처님 일대기를 쓴 ‘월인석보’입니다.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의 제자원리를 풀어쓴 한문해설서인데 이것이 광흥사에서 나왔다는 역사적 배경과 근거 역시 당위성을 가집니다.
세조때 훈민정음의 보급에 힘쓴 신미대사와 학조대사 중 학조대사는 안동 풍산의 소산 출신이시며 광흥사 애련암에서 득도하셨습니다.
광흥사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였고, 영남지역에선 가장 규모가 큰 사찰로서 유교와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간행한 거점사찰이였습니다. 근대의 신문기사에도 광흥사에 훈민정음해례본 목판본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주, 애민, 실용’의 한글 창제 정신은 불교의 가르침에 자연이 녹아듭니다.

이에 소승은 훈민정음해례본의 영인본을 간행하여 원래대로 광흥사 명부전 시왕님의 복장물로 봉안하고자 서원했습니다.
이 불사는‘한글’이라는 위대한 문자의 우수성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 경전을 쉽게 배워 깨우치기를 바랐던 세종대왕의 소망처럼, 소승 또한 무명에서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중생들의 서원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불사들 통해 우리 광흥사가 시대가 요구하는 세대 간이 소통하고 화합하고, 사람들을 힐링하는 밝은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광흥사 신도님들과 광흥사에 인연맺은 분들이 결속하는 기회가 되기를 발원합니다.
훈민정음해례본 복장봉안 불사에 동참하시어 각기 가문에 한 권씩 소장하시고 불사동참 공덕으로 세세생생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시기를 바라옵니다.


      2013년 9 월 5 일  광흥사 주지 묘청 범종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