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대사 창제설_1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 덕분이다. 이 책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에 대해 상세히 풀이한 문헌이다.

책의 뒷부분을 보면 정인지가 쓴 서문 끝머리에 ‘1446년 음력 9월 상순’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확정된 것이다.

이처럼 한글날이 정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창제과정과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럼 한글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너무 뻔한 것을 묻는다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올지 모르겠다. 한글은 당연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만든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까지 집현전 학사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글 창제 이후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상소한 것도 바로 집현전 학사들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2개월 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ㆍ직제학 신석조를 비롯해 김문ㆍ정창손ㆍ하위지 등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그와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난다.
“만일 언문을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여 의혹됨이 없는 연후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상소문의 내용을 뒤집어 생각하면 한글 창제 작업 전에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또한 집현전 학사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성삼문과 신숙주의 경우를 살펴봐도 한글 창제와 별 연관이 없다. 성상문은 한글이 거의 창제되었을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창제 2개월 전에 들어온 신숙주는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한글 창제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유학자들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는 정신)이 깊을 때라 미리 알렸더라면 더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을 게 뻔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세종으로서는 한글 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작업은 누가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443년 12월 30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상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해례본

즉, 세종 혼자서 창제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이 그처럼 엄청난 작업을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한글 창제 전의 몇 년 간은 세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던 때라 정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연(經筵)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집현전 학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밀리에 누가 세종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꼽히는 인물들이 바로 세종의 자녀들인 문종과 수양대군ㆍ안평대군ㆍ정의공주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거론되는데, 그가 바로 신미대사이다. 특히 신미대사의 경우 단순히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세종 및 한글과의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추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글이 범자(梵字 ;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설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불교 경전은 범어로 기록된 것이 많았다. 승려인 신미대사는 불경을 번역한 한자에 오역이 많음을 알고는 독학하여 범어 및 티베트어를 비롯한 5개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범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세종보다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443년 12월 30일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도 ‘모양은 본뜨되 옛 전자를 모방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전자(篆字)란 가장 오래된 한자 글씨체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이 지은 저서를 보면 한글의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유학자인 성현은 훈민정음 반포 30년 후에 지은 ‘용재총화’에서 ‘그 글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조선 중기의 명신인 이수광도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과 이능화 역시 한글은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실록이나 정인지가 언급한 ‘전자’는 곧 ‘범자’의 한자식 표현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글과 범자의 음운 체계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오랫동안 한글과 범자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한국세종한림원의 강상원 박사는 자음의 기본을 이루는 아음ㆍ설음ㆍ순음ㆍ치음ㆍ후음의 5가지 음운체계가 범자에도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순우리말 중 상당수가 범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리랑은 범어에서 ‘사랑하는 임’을 뜻하는 ‘ari’와 ‘서둘러 떠나다’는 뜻의 ‘langh’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 이에 의하면 아리랑은 ‘사랑하는 임이 서둘러 떠나다’라는 뜻이 된다.

밥 역시 ‘어머니의 젖’을 의미하는 범어 ‘vam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사에 의존해온 우리 민족의 경우 쌀로 지은 밥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볼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한글의 범어 모방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과 관련이 있다. 각필이란 상아나 대나무로 뾰족하게 깎아 만든 필기구로서, 옛 문헌의 글자 옆에 점과 선ㆍ부호 등을 눌러서 표시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던 양식을 뜻한다.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 경전을 조사한 결과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일치하는 각필이 무려 17개나 발견되었다는 것. 더구나 자음과 모음의 체계도 각필과 유사한 점이 많음을 볼 때 한글의 범자 모방설 및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참여설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책이 모두 불교서적이라는 점이다. 석보상절과 능엄경언해는 불교경전이고 월인천강지곡 역시 찬불가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게 생각하여 만든 문자라면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에서 논어와 맹자 같은 유교 경전을 먼저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해야지 왜 불경 같은 불교서적들을 먼저 번역했던 것일까.


▲ 훈민정음 반포 재현 행사
이는 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체계와 표기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가 불경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그 당시 세종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신미대사가 그 주인공으로 지목된다.

실제로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 관련 서적이며, 유교 관련 서적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한글 창제와 불교의 연관설은 몇 가지 숫자에도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편찬한 ‘월인석보’의 첫 머리에 실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한글 어지는 정확히 108자이며, 그것을 한문으로 적은 한문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 이는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글자를 탈락시키거나 다른 글자로 대체하는 등의 의도적인 조절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월인석보의 제1권은 정확히 108쪽이다. 이처럼 108을 고집한 것은 불교에서 신성한 숫자로 여기는 108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의 28자로 만들어진 문자이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28은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는 횟수와 똑같다.

때문에 한글 창제의 숨겨진 또 하나 목적은 새 문자를 통해 불교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평민들도 불교의 교리를 알게 되어 불교 포교의 새 전기가 마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셈이다.
이성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