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대사 창제설_2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을 뒷받침하는 세 번째 근거는 그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문종은 즉위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미대사에 대한 제수(除授)를 거론했다. 선왕인 세종대왕께서 제수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의 질병으로 미뤄졌으니 지금 제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

그러나 졸곡(卒哭 ; 사망한 지 3개월 후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 후에 제수해도 늦지 않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따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450년 7월 6일 문종은 신미대사에게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의 26자에 이르는 긴 법호를 내렸다.


▲ 신미대사가 주로 머물렀던 속리산의 복천암

존자(尊者)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였는데, ‘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실록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법호 중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국이세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억불숭유 정책을 취한 조선에서 신미대사의 법호에 그런 말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세종대왕이 내세운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문종이 우국이세를 굳이 법호에 포함시킨 것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미대사에게 법호가 내려진 후 잇따른 신하들의 상소와 그에 대한 문종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하위지ㆍ홍일동ㆍ신숙주ㆍ이승손 등은 신미의 칭호가 부당하다며 적극 반대했고, 집현전 직제학이던 박팽년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 불경한 문구를 사용하여 파직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에 대한 신하들의 직언이 끊이질 않자 문종은 결국 20일 만에 신미의 칭호를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체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로 고쳤다.

존자에서 종사(宗師)로 바꾸고, ‘우국이세’란 말은 아예 빼버린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을 잘 되게 한다’는 뜻의 ‘도생이물(度生利物)’이란 문구를 넣었다.

이밖에도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많다. 신미대사의 가문인 영산 김씨 족보를 보면 ‘수성이집현원학사득총어세종(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이란 문구가 나온다.


▲ 복천암의 동쪽에 건립되어 있는 신미대사의 수암화상부도. 보물 제1416호.

여기서 수성은 신미대사의 속명인데, 풀이하자면 신미대사는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에게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 신미대사가 있던 속리산 복천암에 세종은 불상을 조성해주고 시주를 했다. 또 승하하기 불과 20일 전에 세종은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서 법사를 베풀게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우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 간행했을 때 신미대사는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그밖에도 많은 불교 서적을 한글로 직접 번역했다. 따라서 신미대사라는 인물이 만약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의 한글 문헌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럼 왜 세종은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를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았을까. 또 실록이나 그 당시 전하는 어떤 기록에도 신미대사와의 한글 창제 관련 문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한글 창제를 반대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거기다 승려가 관여했다고 발표하면 유생들의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세종은 유학자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그들이 신미대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 차원에서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관여를 비밀에 부쳤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후 이론적 체계 확립과 훈민정음의 보급 사업을 슬쩍 집현전에 맡겼는데, 이 역시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대사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록에서 신미대사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6년(세종 28년) 5월 27일이다. 그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 화상(신미대사를 지칭함)은 비록 묘당(의정부)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는가”라며 그를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신미대사의 호칭 앞에는 ‘간승(奸僧)’ 내지 ‘요망한 중’이라는 글귀가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미대사의 친동생인 김수온이 벼슬을 제수 받을 때도 형인 신미대사가 요사한 말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투로 기록하고 있다.


▲ 훈민정음 반포 장면을 그린 그림

이처럼 승려(혹은 신미대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분위기에서 그의 운신 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신미대사가 직접 번역한 불교 경전의 초판본에는 법호가 명시돼 있지만 재판본에는 빠져 있는 걸로 볼 때, 세종 사후에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신미대사와 관련된 문구를 모두 삭제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설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우선, 승려의 참여 증거로 꼽히는 범자모방설의 경우 한글의 수많은 문자 모방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산스크리트 문자인 범자 외에도 티베트 문자 모방설, 일본의 신대문자 모방설, 단군 조선의 가림토문자 기원설 등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가 점령국들의 언어를 통일하여 표기할 수 있게 만든 파스파 문자가 고려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훈민정음의 창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정초가 지은 ‘육서략’에서 논리적으로 문자를 만드는 과정이 서술된 부분을 참고하면 한글의 기본 자음자를 모두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발음기관 상형설’과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모양을 본뜨고 자음은 음양오행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불교 서적의 간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말년에 불교로 귀의한 세종의 행적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전인 1444년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는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을,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부인인 소헌왕후를 차례로 잃었다.

그로 인한 슬픔을 이기는 과정에서 불당의 법회를 베푸는 등 자연스레 불교에 빠져들었고, 한글 창제 후 불경의 간행을 우선적으로 진행했을 수 있다. 또한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호불왕(好佛王)으로 불릴 만큼 과감하게 불교중흥정책을 펼쳤다.

한글로 된 불교 서적의 간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이런 왕실의 분위기와 한글을 업신여기는 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영산 김씨의 족보 역시 정식 사료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가문의 족보라는 점이 문제다. 족보에는 언제나 과장되거나 아전인수식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정보다. 한글의 창제 원리가 이론적으로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한글의 타 문자 모방설은 여러 가지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