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 (月印釋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것과 『석보상절』, 혹은 『월인석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3종류의 간행본이 있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처음 간행된 권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3, 25와 재간행된 권 4, 21, 22 등 총 19권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 2대에 걸쳐 임금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조선 전기 훈민정음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정의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책.

내용
목판본. 초간본 10권(권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권(권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권(권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합편을 함에 있어서 조권(調卷)도 다르고 내용에도 많은 첨삭을 가하는 등 상당한 변개를 행하였다.

먼저 조권을 보면 『석보상절』 권11과 권19의 내용이 각각 『월인석보』 권21과 권18에 나타나는가 하면, 같은 권13이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 『월인석보』는 『법화경』 권2,3의 내용을 담고 있는 등, 권11부터 권차(卷次)가 달라져 있다. 문장과 표기법을 보면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 표기의 위치, 한자음 종성 ‘ㆁ’과 협주(夾註)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수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월인석보』는 전혀 새로운 문헌이 되었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석보상절』로 미루어서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이 되지 못한다. 전하는 간본의 종류와 소장자, 영인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권1·권2
2권1책. 초간본이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2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으로는 1568년(선조 1) 희방사(喜方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책판(冊版)이 6·25 이전까지 보존되었다. 이 간본의 권1은 1960년 국어학회(國語學會) 고전총서로 영인되었다.

(2) 권7·권8
2권2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1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1572년 비로사(毘盧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1957년 청사진본(靑寫眞本)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에서 축소 영인하였고, 권7을 1978년 동국대학교 동악어문학회(東岳語文學會)에서 영인하였다. 한편, 16세기 중엽의 복각(覆刻)으로 보이는 권8의 중간본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六堂文庫)에 있다.

(3) 권9·권10
2권2책. 초간본(낙장있음)이 양주동가(梁柱東家)의 구장(舊藏)으로 전하는데, 1957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하였다. 서울의 김민영이 소장하고 있다.

(4) 권11·권12
2권2책.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5) 권13·권14
2권2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있으며, 1982년 홍문각(弘文閣)에서 영인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6) 권17·권18
2권1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수타사(壽陀寺 : 강원도 홍천)에 소장되어 있는데, 1957년에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초간본으로 보림사(寶林寺 : 전라남도 장흥)에 권17만 소장되어 있는데, 수타사본의 낙장부분만 1972년 『한글』 150호에 영인되었다.

(7)
권21
1권2책. 중간본만 전하며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542년(중종 37) 광흥사(光興寺 : 경상북도 안동), 1562년(명종 17) 무량굴(無量崛 : 전라북도 순창), 1569년(선조 2) 쌍계사(雙溪寺 : 충청남도 은진)에서 복각하였다. 권21의 광흥사판을 1983년 홍문각에서 영인하였다.

(8) 권22
1권1책.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6세기 중엽 한 사찰에서 복각하였다.

(9) 권23
1권1책.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 기(其)497∼524까지 28수가 실려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처럼 싣고 있는데 『석보상절』 권23의 내용과는 다르다. 1559년 무량굴에서 복각한 것이다. 1963년 『동방학지(東方學志)』 6집에 영인되었다. <李東林>

(9) 권25
1권 1책.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소장되어 있다. 『월인석보』의 전체 권수가 몇 권으로 구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보림사 사천왕상 복장에서 새로 제25권이 발견되어 『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편찬된 것임이 밝혀졌다. 권 머리 부분에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탈락되어 있다.

이 「월인천강지곡」에 해당되는 『석보상절』은 권24의 내용인데, 이 『석보상절』의 내용을 『석가보』 권5와 『경덕전등록』 등에서 수정 보완하여 싣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주석 부분에는 사분률(四分律)·현우경(賢愚經)·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다론(多論)·계단경(戒壇經)·대품(大品)·지론(智論)·갈마소(鞨磨疏)·십송률(十誦律) 등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은 권 머리 부분과 마지막에 탈락되었기 때문에 몇 수가 실렸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기 577부터 583까지 7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권말에는 「월인천강지곡」 기 582와 583을 싣고 여기에 대한 주석(註釋)이 한 장 분량만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탈락되었다.

제일 끝에 실린 「월인천강지곡」 기 583은 내용상 결론 부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이 부분의 설명이 『석가보』 권5의 내용 가운데 아육왕조팔만사천탑기(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까지만 실려 있고 석가획팔만사천탑숙연기(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석가법멸진연기(釋迦法滅塵緣記)·석가법멸진상기(釋迦法滅塵相記)의 내용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전체 내용 구성상 뒷부분에 월인천강지곡 4∼5곡을 포함하여 상당량의 내용이 탈락된 것(약 30여 장)으로 추정된다. 「朴相國」이 『월인석보』는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산문 자료로서 국어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권1 앞에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이 실려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이 책은 세종과 세조의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으로, 현존본에 나타난 판각기법이나 인출(印出) 솜씨 등을 보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되었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세조 때 다시 편집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에 유통된 중요경전이 취합된 것이므로 당시 불교 경전의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