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익기 :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 당장 못 내놔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 당장 못 내놔, 훼손돼도 어쩔수 없어

풀려난 뒤 말바꾼 배씨
"지금 내놓으면 책도 뺏기고 도둑 오명도 완전히 못 벗어… 소유권부터 되찾을 것"
9일 오전 경북 상주시 낙동면 한 농가. 쓰러질 듯 낡은 집 안의 마루와 방, 마당 곳곳엔 골동품 가구와 도자기, 불상 등이 어지럽게 놓여있고 한쪽엔 고서(古書) 수백 권이 수북이 쌓여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상주본을 훔쳐 4년 넘게 감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가 지난 7일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배모(49)씨의 집이다.

흰 삼베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배씨는 기자와 만나 "숨겨 놓은 해례본이 무사한지 아직 살펴보지 못했다"며 "남들 눈이 있는데 풀려나자마자 숨겨 놓은 곳에 뽀르르 달려갔겠느냐. 아닐 말로 이미 훼손됐대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지난 7일 무죄 선고로 1년 만에 석방된 배모씨가 경북 상주시 본인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는 자기 실명을 밝히는 것은 꺼렸지만, 얼굴 공개엔 동의했다.

배씨 사건에 대한 항소심 당일 재판장은 배씨에게 "상주본이 반드시 빛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역사와 민족과 인류에 대한 책무이므로 전문가에게 맡겨 보관·관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고, 그는 "책임지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만난 그는 여전히 상주본 행방을 밝히지 않았고, 당분간은 그럴 뜻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내놓으면 책도 뺏기고, 아직 도둑이라는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앞서 작년 6월 대법원은 상주의 한 골동품상인 조모(67)씨가 상주본을 보관 중인 배씨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배씨가 (조씨에게서) 훔친 것이니 조씨에게 해례본을 돌려주라"고 판결했지만 배씨는 응하지 않았다. 검찰과 법원 등이 수차례 강제 집행과 압수 수색을 했으나 해례본의 행방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지난 5월 '상주본의 소유권자'라는 판결을 받은 조씨는 문화재청에 해례본을 기증한 상태다. 또 최근 상주본 절도 혐의에 대한 형사소송 항소심에서 증거 불충분 등으로 패소한 검찰도 배씨에 대한 상고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상주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배씨는 이에 대해 "상주본을 내놓는 즉시 문화재청이 뺏으려 들 텐데 뭐하러 그러느냐(내놓겠느냐)"며 "해례본을 국가에 기증한다 하더라도, 그간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떳떳하게 나 또는 우리 가족 등의 이름으로 기증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배씨는 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떠밀리듯 공개해 남의 이름(조씨)으로 (기증)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배씨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서로 입을 맞추고 나에게 의도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을 위증 및 교사 등으로 고소했다"고 말했다. 배씨는 "위증 등이 인정되면 대법원에 민사소송 재심을 신청해 상주본의 소유권을 되찾을 것"이라고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런 소송이 모두 끝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예상된다"며 "배씨가 대법원에 민사 재심을 신청한다 하더라도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밝혔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